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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유한 자의 복(마태복음5:1-12),김범수 목사, 주일설교   18-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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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2.11.          온유한 자의 복(마태복음5:1-12)
김범수 목사                                          워싱턴동산교회
 
우리 믿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어떤 일을 하며 살아야 하는가? 이것은 참 중요한 질문입니다. 이것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앞으로 8가지 삶의 원리와 실천에 대해서 꼭 마음에 품어야 합니다. 그것은 이미 우리가 마음이 가난해 지는 것, 애통해 하는 것, 그리고 오늘 세 번째 온유해 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이 가난해 지는 것을 먼저 시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애통해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한 단계 더 깊이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고 산다면 늘 애통해 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한 것이 없고, 늘 죄송한 마음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오늘 온유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마음이 가난해서 애통해서 내 마음에 있는 모든 것들을 다 털어내면 무엇이 남습니까? 온유가 남습니다. 이 온유는 빈 마음을 가득채우는  풍요로운 영혼의 세계입니다. 그 온유는 모든 것들을 소유하는 경지가 바로 온유입니다. 그 소유가 부족한 상태가 아니라 여유로운 상태입니다. 어느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 온유입니다.
오늘 말씀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먼저 이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는 먼저 세상적인 가치와 정 반대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는 누가 땅을 차지합니까?
힘 있는 사람, 권력 있는 사람, 그리고 싸움 잘하는 사람이 땅을 차지합니다. 역사가 그것을 말씀해 주지 않습니까? 언제나 힘 있고 강한 자가 세상을 차지합니다. 그리고 땅을 차지합니다. 그래서 힘 있는 사람 앞에서는 힘없는 사람은 비굴해지고 넘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세상에서 힘있고, 권세가 있고, 땅을 차지해서 떵떵거리며 살려면 온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온유라는 것이 무엇인데 이렇게 말씀합니까?

1. 온유한 사람은 사랑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온유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갖는 첫 번째 인격의 모습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와 애통하는 자가 만들어 낸 첫 번째 모습이 온유입니다. 그러면 온유는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인격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온유는 사랑입니다. 온유는 따뜻함입니다. 부드러움입니다. 너그러움입니다. 그 온유를 가진 사람은 모든 것을 다 녹일 수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그 세계를 말할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어떤 존재입니까? 정말 악한 존재들입니다. 왜 악합니까? 사랑이라 말하면서 사랑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라는 말은 사람에 대한 것만이 아닙니다. 이 세상 모든 것들에 대한 것들입니다.  우리는 온통 이기심과 욕심과 자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온유보다는 사나움과 난폭함과 분노 욕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예) 배고픈 하이에나 떼들을 보셨습니까? 하이에나가 사슴을 잡으면 어떻게 합니까? 떼로 달려듭니다. 양보할 사이도 없이 달려듭니다. 배가 고프니까 남이 배고픈 사정을 생각할 여유가 없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온유는 공간입니다. 온유는 여유입니다. 영어로 말하면 온유는 남이 가진 그 마음의 영역 그 이상의 것입니다. 그래서 온유는 EXTRA입니다. 남이 하는 그 수준 그 이상의 것입니다. 온유는 이해하고, 양보하고, 기다리고, 용서하는 것들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만달란트를 탕감 받은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예) 어떤 사람이 살기 힘든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어떻게 해서라도 살기 위해서 사업을 하려고 돈을 빌렸습니다. 일억을 빌렸습니다. 그렇게 빌려주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도 큰 축복입니다. 이렇게 해서 사업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사업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그 돈을 다 날렸습니다. 돈을 빌려준 사람이 그 사람에게 돈을 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돈을 갚을 능력이 없습니다. 돈을 빌려준 사람은 채무자를 만나 그 돈을 갚지 말라고 합니다. 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그런데 이 채무자가 채권자와 헤어지고 나서 길을 가는 동안에 10년 전에 자기에게 돈 10만원을 빌려간 사람을 만납니다. 그 사람을 만나자 마자 그 사람에게 돈을 갚으라고 합니다. 갚지 않자 그 사람을 고소해서 옥에 가두고 맙니다.
이것을 우리는 온유라는 범위 내에서 보아야 합니다. 온유는 무엇입니까? 온유는 내 마음의 수용력을 더 넓히는 것입니다.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내가 받은 것이 너무 크기에 그 어떤 것도 결코 내가 요구할 수 있는 것들이 없다는 것입니다. 고무풍선같이 늘어나는 내 마음, 할 수 있다면 고무풍선은 터지지만 내 마음은 터지지 않도록 계속 내 마음을 넓혀가는 마음이 온유입니다. 그래서 내 마음의 땅이 넓어지고 모든 사람, 모든 세계를 소유하게 됩니다.
 
2. 온유한 사람은 인내의 사람입니다.

온유는 사랑입니다. 사랑인데 일반적인 사랑 그 이상의 것입니다. 보통이 아니라 곱빼기입니다. 남이 사랑하는 정도로 사랑하는 것은 온유가 아닙니다.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는 것이 온유입니다.
왜 그래야 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길들여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물들였고, 훈련되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약을 먹으면 그 약이 온 몸에 들어와 몸이 길들여집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길들여져야 합니다. 옛 모습을 그대로 가져서는 안 됩니다. 우리 속담에 그런 속담이 있지 않습니까? 개꼬리 삼년 묻으면 인삼되겠느냐?“
예수 믿는 사람은 반드시 달라져야 합니다. 변화되어야 합니다. 에베소에 말씀합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에베소서4:22-24)
우리가 어떤 사람입니까? 새 사람입니다. 새 사람은 옛날 사람과 달라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실 어떻습니까? 옛날의 나의 모습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옛날부터 가진 성질, 성품, 기질, 습관들이 그대로 있습니다. 이것은 온유가 아닙니다. 온유는 사랑을 받은 사람이 사랑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랑은 인내입니다. 왜 사랑이 인내여야 합니까? 사랑은 참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설명) 누구든지 온유는 그냥 부드러움, 따뜻함, 착함 정도로 생각합니다. 온유는 이를 악물고 참아내는 고통입니다. 그래서 온유는 길들여진 성품입니다. 그래서 온유는 사나운 맹수를 온순하게 길들여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길들여지는 것, 통제입니다. 전기를 키고 싶으면 스위치를 올리고, 끄고 싶으면 내립니다. ON, OFF가 가능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안 되면 어떻게 됩니까? 방전이 됩니다. 불편합니다. 내 마음이 통제가 안 될 때 어떻게 됩니까? 두 가지 현상이 나타납니다. 하나는 내 마음이 캄캄해서 두렵거나 하나는 에너지가 소모가 됩니다.  성경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베드로전서3:4)
“평온한 마음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를 썩게 하느니라(잠언14:30)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잠언17:22)
 예) 가끔씩 동물 조련사가 악어 입에 머리를 집어 넣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아직 악어에게 물려 죽은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동물 조련사가 자기가 훈련시키던 곰에게, 사자에게, 호랑이에게 물리는 사건들을 보게 됩니다. 온유는 무엇입니까? 내가 물어 죽일 수 있는 그런 상황에도 물지 않는 것이 온유입니다. 그 대표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마음이 겸손하고 온유하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의 예수님이십니다. 그 사랑은 온유입니다. 온유는 겸손입니다. 왜 온유가 겸손입니까? 대신 욕해도 되고, 대신 말해도 되고, 대신 때려도 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위해 희생하셨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떡을 먹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병을 고치셨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변호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증언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나쁘다고 했습니다. 전통을 무시하고, 해야 할 도리를 다하지 않고, 오히려 로마 정부에 대항하는 선동가였다고 했습니다.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쯤 되면 예수님도 자기를 변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이 그들 앞에서 의인이라고 할 때 예수님 자신은 의인으로 인정될지 모르지만 그들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살면 네가 죽고 내가 죽으면 네가 산다는 것, 생즉사, 사즉생이라는 말입니다.
적용) 온유는 참고 참는 것입니다. 뼈 속까지 참는 것입니다. 화가 나도 참고, 초조해도 참는 것입니다. 억울해도, 분해도, 답답해도, 원통해도 참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습니까?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자신을 토해 냅니다.
 
3. 온유한 사람은 충성하는 사람입니다.

온유한 것은 그냥 얌전한 것이 아닙니다. 말없이 그냥 앉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냥 조용한 것이 온유함이 아닙니다. 온유함은 무섭게 달려드는 것입니다. 무섭게 달려드는 데 다른 사람을 해치는 것은 만용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구원하는 일은 용기입니다. 믿는 사람은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용기는 자신의 의지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용기는 믿음에서 나옵니다. 용기는 사명에서 나옵니다. 용기는 충성에서 나옵니다.
예)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른 제자들은 다 주를 버릴 찌라도 자기는 주를 버리지 않겠다고 고백합니다. 상당히 용기가 있어 보입니다. 그런데 그 용기는 진정한 용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교만이요, 만용입니다.
설명)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씩이나 부인하고 나서 물고기를 잡으러 갈릴리 바다로 갔을 때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나타나서 세 번 씩이나 묻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세 번 씩이나 이렇게 말합니다. “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이 말은 이렇게 달라졌습니다. 주를 버리지 않겠나이다 라고 한 것은 자기를 내세우는 말입니다. 그러나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라고 한 말은 겸손한 고백입니다. 이 말은 그냥 말만이 아니라 그렇게 행하고자 하는 용기입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주를 위해서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 마음에 작정하고 고백하는 용기입니다.
예) 성경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라고 칭찬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모세입니다. 모세가 온유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온유의 의미와 모세와 대비를 해보세요. 모세가 온유하게 보입니까? 아니면 사도요한이 온유하게 보입니까?
 온유는 헬라어로 ‘프라우스(praus’-히브리어로 온유는 ‘아나우(anaw)’라고 하는데 ‘겸손’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아나우)는 ‘아나’(겸손히 행하다/굴복하다/낮아지다/비천해지다’ 의미입니다. 정리하면, 온유=겸손인데, 그 뉘앙스가 괴로움/가난/고뇌와 연관된 의미입니다. 한마디로 ‘비천한’이라는 어감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온유란, 비천하고 낮아짐에서 오는 온화함이 됩니다. 그냥 성격이 부드럽고 좋다는 뜻이 아니라는 의미죠.
그래서 NIV, NASB는 민 12:3절, 모세의 온유함을 ‘humble’(겸손)으로 번역했습니다. 영어 humble(겸손한)은 humility(비천함)이란 뜻도 갖고 있다고 합니다.
민수기12:3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민 12:1)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더니 그 구스 여자를 취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니라 
(민 12:2)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민 12:3)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했습니다. 모세가 구스 여자를 아내로 취한 것에 대해 비난했습니다. 당시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미리암과 아론은 자기들도 올바로 생각하고 올바로 판단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렇게 구스여자와 결혼했다고 하지만 올바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비방합니다. 나를 욕합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합니까?  모세는 미리암과 아론이 그렇게 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5절에 보면 (민 12:4) 여호와께서 갑자기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에게 이르시되 너희 세 사람은 회막으로 나아오라 하시니 그 세 사람이 나아가매 모세는 가만히 있는데 하나님께서 개입하십니다. 그러면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민 12:5) 여호와께서 구름 기둥 가운데로부터 강림하사 장막 문에 서시고 아론과 미리암을 부르시는지라 그 두 사람이 나아가매
(민 12:6) 이르시되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환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민 12:7)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내 온 집에 충성함이라
여러분! 충성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충성은 드리는 것입니다. 드리는 사람은 용기가 있는 사람입니다. 용기가 없으면 드릴 수 없습니다.
싸움에서 이기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용기가 있는 사람입니다. 죽을 각오를 하는 사람은 용기를 가지고 달려갑니다.
예) 평창 올림픽을 보니까 자기 실력이 있으면서도 자기 실력을 다 발휘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두려워서 그렇습니다. 자기가 금메달을 따지 못하면 어떻게 할까 무서워서 자기 실력을 다 쓰지 못하고 실수를 합니다.  이번에 스켈레톤 남자 경기에서 금메달을 딴 윤성빈 선수를 보세요. 그 사람의 별명이 IRONMAN입니다. 강한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온유는 강한 사람입니다. 온유는 용기의 사람입니다. 용기는 충성의 사람입니다. 죽을 준비를 하고 사는 사람은 충성의 사람입니다. 잃어버릴까 갖지 못할 까 조마조마 하는 사람은 얻을 수 없습니다. 지금은 얻을 수 있지만 결국 모든 것을 다 얻지 못합니다.

결론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결국 땅을 기업으로 받기 때문입니다.
이 땅은 보이는 땅과 보이지 않는 땅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입니다. 그리고 영적 세계의 땅입니다. 결론은 하나님의 나라, 천국입니다. 그러나 천국에 갈때까지 우리에게 주시는 영적인 세계의 풍요로움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적축복은 우리가 표현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은혜를 받는 것도 다 수준이 있고, 단계가 있습니다. 에스겔이 성전에서 발목과 무릎과 허리와 헤엄치지 못할 정도로 물이 넘쳤다고 했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의 땅을 밟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땅에서 집을 짓고,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하나님의 집에서 은혜와 평강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온유의 풍요의 복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고, 인내하고, 충성하는 여유의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애통하는 자의 복(마태복음5:1-12), 김범수 목사, 주일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