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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삶(마가복음2:1-12), 김범수 목사, 워싱턴동산교회, 2017.9.3.   17-09-25
pastor   744
 

주일예배                                            김범수 목사
        2017.09.03.    믿음과 삶(마가복음2:1-12)
어느 날 야옹이라는 고양이가 한양에 갔다가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동료 고양이들은 한양 소식이 궁금했습니다. “야옹아, 한양에서 무엇을 보았니?” “임금님의 의자 밑에 있는 생쥐를 보았지.”
“멋진 광화문과 경복궁과 근정전을 보지 못했니? 임금님은 얼마나 멋있고 훌륭하신 분이었니?” “난 생쥐밖에 보지 못했어.”
이것은 정말 너무한 이야기 아닙니까? 여러분들은 지금 무엇을 보고 계십니까? 세상에 제일 무서운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핵무기가 무섭다고 합니다. 그렇죠. 그러나 더 무서운 것이 있습니다. 그게 무관심입니다.
오늘 본문에 한 중풍병자가 나옵니다. 중풍병자가 어떤 사람입니까? 거동이 불편한 사람입니다. 행복하다고 말할 때 그 행복의 정의가 무엇입니까? 불편하지 않는 느낌이 행복입니다. 집이 불편하지 않을 때, 사는 것이 불편하지 않을 때, 먹는 것이 불편하지 않을 때, 사람을 만나는 데 불편하지 않을 때 그것이 행복입니다. 이런 행복을 누리시기를 원합니다.
우리 중에 중풍병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고 싶은데 할 수 가 없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생각대로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인사나누시죠? 어디 불편한데가 없습니까?
오늘 본문에 보니까 이 중풍병자를 네 친구들이 예수님께 데리고 온 것을 보게 됩니다.
1. 중풍병자를 메고 온 네 친구들
3절을 보세요.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이 장면이 얼마나 감동적입니까? 우리가 사는 이유가 바로 이런 그림입니다. 건강한 사람과 건강치 못한 사람, 잘 사는 사람과 잘 살지 못하는 사람, 힘있는 사람과 힘없는 사람들의 만남과 조화, 이것이 바로 화합이고, 평화이고, 협력이고, 상생입니다.
그런데 이런 그림이 그리 쉽지 않습니다. 강자가 약자를 무시합니다. 많은 자가 없는 자에게서 빼앗아 갑니다. 배운 자가 배우지 못한 사람을 업신여깁니다. 그래서 높은 자들은 교만하고, 낮은 자들은 때때로 비참함을 느낍니다.
마르틴 루터의 설교집에는 이런 예화가 있습니다. 사단이 부하들에게 인간을 파멸시킨 성공사례를 발표토록 했습니다. 한 부하는 “나는 야수를 풀어 기독교인 수백 명을 죽였다”고 했고, 두 번째 부하는 “태풍을 일으켜 신자들을 몰살시켰다”고 했습니다. 사단은 “그래서 어쨌단 말이냐, 그들의 영혼이 구원을 받았는데”라며 화를 냈습니다. 세 번째 부하만이 칭찬을 받았습니다. “나는 10년 동안 한 기독교인을 영혼문제에 무관심하게 만들었다. 그는 지금 완전히 우리 편이 됐다”
예) 최근에 한국에서 한 남자가 한 여성을 마구 폭행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보는 사람들이 그냥 지나갔습니다. 물론 남의 일에 참견하다가 큰 일을 당할 것 같고, 또 그들의 일에 간섭하는 것 같은 미안함도 있으니까 그냥 지나갈 수 있습니다.그런데 이 여자가 남자가 때리니까 그만 손에 들고 있던 가방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차를 타고가다가 차에서 내려서 그 가방을 몰래 가지고 가고 말았습니다.
설명) 이것은 예수님께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의 말씀에서 가르치신 말씀과도 같습니다. 한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데 강도를 만났습니다. 거의 죽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 곳에 지나가던 레위인이 그것을 보았습니다. 자기도 죽을 까 그 자리를 피해 도망갔습니다. 제사장도 도망갔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이 지나가다가 그 죽어가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그 사람에게 기름으로 치료하고 나귀에 태워 여관에다 데려다 주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주겠다고 했습니다.
적용) 우리는 눈을 열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볼 줄 알아야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서로 협력하여 서로를 세워주는 비결 6가지가 있습니다.
1)남들이 모두 옷을 입고 있을 때에는 벌거숭이가 되지 말라.
2)남들이 모두 벌거숭이일 때는 옷을 입지 말라.
3) 남들이 모두 앉아 있을 때에는 서 있지 말라.
4) 남들이 모두 서 있을 때에는 앉아 있지 말라.
5) 남들이 모두 울고 있을 때에는 웃지 말라.
6) 남들이 모두 웃고 있을 때에는 울고 있지 말라.
 
2. 지붕을 뜯은 친구들
당시에 예수님은 갈릴리 지역에서는 놀라운 소문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입소문이 상당했습니다. 요즘은 sns가 있어서 한국에서 시작된 이야기들이 미국에 단 1초만에 옵니다. 당시에는 그렇게 빠르지는 않지만 빠르게 전달되었습니다. 그래서 속담이 나오지 않습니까?“ 발없는 말이 천리간다” 그러기에 우리는 말조심 해야 합니다. 신앙생활하면서 내 입에 따라 좋은 소문을 내고 나쁜 소문을 냅니다. “좋은 소문을 냅시다.”“좋은 소식을 전합시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병자를 치료한다는 소문이 들렸습니다. 그러니까 병을 고치려고 예수님이 계신 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렸슴니다. 본문2절을 보세요.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이것을 우리는 인산인해라고 합니다.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불가항력적이라고 합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그냥 포기하고 돌아가야 합니다.왜냐하면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네 친구들이 한 명의 중풍병자를 데리고 들어가려고 하니 더 어렵습니다. 한 사람도 아니고 5 사람이 들어가려고 하니 어려웠습니다. 따라 해보세요. “사는 것은 어려운 것이다.” 누구 나가 쉽게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한 번 쯤은 들어갈 수 없는 상황을 만납니다. 이것을 난관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을 만납니다.
이 때 네 사람은 생각을 합니다. 어떻게 예수님께 이 환자를 데리고 갈 수 있을까? 그래서 지붕을 뜯고 내려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이것이 말이 됩니까? 아무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많으면 기다리든지, 아니면 돌아가든지 해야 합니다. 그런데 지붕을 뜯고 내려가니 기막힌 생각입니다.
설명) 무슨 일이든지 길이 없는 것이 아니라 길을 못 찾아서 문제입니다. 믿음에는 길이 있습니다. 믿음에는 막히는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역경중에서 피할 길을 주십니다. 어떤 일에도 절망하거나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예화) 페루의 선원들이 아마존강을 항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거대한 스페인 배 한 척이 강 위에 떠 있었다. 선원들이 스페인 배에 올라가 보니 수십 명의 스페인 사람들이 쓰러져 있었다. 입술은 새까맣게 탄 채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그들은 마실 물이 없어 죽어가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페루의 선원들이 스페인 사람들을 흔들어 깨웠다.“우리에게 마실 물을 주시오. 우리는 지금 물이 없어 죽어가고 있소”
페루 선원들은 아마존 강물을 퍼올려 스페인 사람들을 먹였다.
그제서야 그들은 정신을 차렸다. 스페인 선원들은 사실 넓은 아마존강에 떠 있었다. 그러나 넓은 바다에서 길을 잃었기 때문에 지금도 바다 가운데 있다고 생각하고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람들은 가끔 환경에 대해 막연한 공포를 느낀다. 지금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환경이 아니라 ‘절망’이라는 이름의 바다다.
적용)단테는 그의 책「신곡」에서 지옥을 설명할 때 지옥에 이런 글이 있다고 했습니다. 지옥 입구에“이곳에 들어오는 모든 자들은 소망을 포기하라!”라고 붙여 놓았습니다. 어떤 어려운 상황 속에서 길을 찾으려는 노력과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고전 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예화)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미워합니다. 형들은 요셉을 아랍의 상인들에게 요셉을 노예로 팝니다. 요셉이 노예로 끝났습니까? 끝나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집으로 가게되고, 거기서 집안의 총무가 되었습니다. 또 감옥으로 가게 됩니다. 그것이 끝입니까? 거기서 또 바로 앞에 서게 됩니다. 우리가 숨을 쉬는 동안에는 끝은 없습니다. 모든 일은 새로운 시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새로운 일을 시작하십니다. “이전 것은 지나 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길이 있습니다.

3. 믿음을 가진 친구들
지금 예수님은 가버나움의 집 안에서 말씀을 가르치시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 네 친구들이 지붕을 뜯고 위에서 환자를 아래로 내려보냅니다. 위에서 환자가 내려오니 그 방안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는 그 시간이 방해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상황에서 그들에게 다른 말씀을 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설명) 믿음으로 하는 모든 것은 부끄러운 것이 없습니다. 책망받을 일이 없습니다. 그 네 친구들은 중풍병자를 사랑했고, 또 그 중풍병자를 예수님이 고치신다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그 병자를 들고서 지붕을 뜯고 내려 오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내려오는 병자를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으니라”
누구의 믿음입니까? 그 친구들의 믿음입니다. 또한 그 병자의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보셨습니까? 그들의 영웅적인 행동을 보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 속에 있는 믿음을 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것은 우리의 믿음입니다. 우리의 행동이 아무리 크고 위대하고 훌륭할 지라도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에게서 인을 받을 수 없습니다. “(히 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우리가 갈고 닦아야 할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그들이 무엇을 하는 사람이냐가 아니라 그들이 어떤 사람이냐를 보셨습니다. 믿음은 무엇입니까? 믿음은 “하나님이 하신다.”를 믿는 것입니다. 나는 못해도 하나님은 하신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I CAN DO EVERY THING THROUGH HIM WHO GIVES ME STRENGTH.
예화) 19세기 최고의 시인 롱펠로에게는 두 명의 아내가 있었다. 그 유명한 화살과 노래라는 시와 인생찬가라는 시가 유명합니다.
첫 번째 부인은 오랜 투병생활을 하다가 외롭게 숨졌고 두 번째 부인은 부엌에서 화재가 발생해 비참한 최후를 마쳤다. 이런 절망적 상황에서도 롱펠로의 시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임종을 앞둔 롱펠로에게 한 기자가 물었다. "숱한 역경과 고난을 겪으면서도 당신의 작품에는 진한 인생의 향기가 담겨 있습니다.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롱펠로는 마당의 사과나무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나무가 나의 스승이었습니다. 저 나무는 매우 늙었습니다. 그러나 해마다 단맛을 내는 사과가 주렁주렁 열립니다. 그것은 늙은 나뭇가지에서 새순이 돋기 때문입니다."
롱펠로우가 쓴 시 “인생찬가 PSALM OF LIFE"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렇게 시를 썼습니다.
자,우리 모두 일어나 일하자.
어떤 운명에도 굴하지 않을 용기를 가지고
끊임없이 이루고 도전하면서
Let us, then, be up and doing,
With a heart for any fate;
Still achieving, still pursuing,
Learn to labour and to wait.
 결론
예수님은 그 병자를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지금 우리는 무엇인가를 잘못 듣고 있습니다. 작은 자야 네 병을 고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네 죄사함을 받았느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죄사함과 병을 고치는 일은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곧 우리가 우리의 육신과 영혼은 떨어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먹고 잘 산다는 것은 우리의 배가 잘 먹고 잘 산다는 것뿐 아니라 우리의 영혼 마음까지 잘 먹고 잘 살아야 합니다.
육신만 건강하다고 건강한 것이 아니고 마음이 건강해야 육신도 건강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단지 우리가 인생에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 만 바라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죄를 해결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 나의 죄를 용서해준 구원자라고 믿습니까?
그렇다면 어떠한 문제도 우리에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문제를 당할 때 함께 하는 사람들이 내 옆에 있다면,
문제를 해결하려는 우리의 노력이 있다면,
문제를 해결해 주는 우리의 구원자 예수를 믿는 믿음이 있다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따라 해보세요.  “믿사오니 평안케 하소서!”
 

예수님과 믿음(마가복음2:1-11),김범수 목사,2017.9.17. 워싱턴동산교회 
믿음의 증거(마가복음16:14-18), 김범수 목사, 워싱턴동산교회, 2017.8.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