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titled Document Javascript DHTML Drop Down Menu Powered by dhtml-menu-builder.com

MEMBER LOGIN

MEMBER LOGIN

길잃은 양을 찾는 목자(누가복음15:1-7), 김범수 목사, 2017.08.06.워싱턴동산교회, 주일예배   17-08-12
pastor   317
 

주일예배                                            김범수 목사
          2017.08.06. 길잃은 양을 찾는 목자(누가복음15:1-7)

    혹시 조난을 당해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아니면 조난을 당했다 생각을 해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얼마나 무섭고 두렵겠습니까? 혼자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길을 잃고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두려우실 것입니다. 외로우실 것입니다. 고독감이 찾아 올 것입니다. 혹시 살면서 두려움을 느끼십니까? 성공할지 실패할지 두렵습니까? 이런 것은 무엇인가 우리 마음에 무엇을 잃어버리고 사는 것입니다. 고독감을 느낄 때, 먹을 것, 입을 것이 만족스럽지 못할 때 우리는 잃어버리고 사는 것입니다. 헤밍웨이는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라는 책에서 “Lost Generation"이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1926년에 그런 말을 했으니 지금은 어떨까요? 우리는 많은 것들을 잃어버리고 삽니다. 때로는 물질을, 때로는 명예를, 때로는 건강을 잃어버리고 삽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관계를 잃어버리는 것이 더 큰 것을 잃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관계를 잃어버리는 것은 가장 중요한 것을 잃어 버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양 한 마리를 잃어 버렸습니다. 이 양은 주인을 잃어 버렸습니다. 이 양은 주소를 잃어 버렸습니다. 이 양은 주제를 잃어 버렸습니다. 주인은 목자입니다. 목자는 양을 인도합니다. 목자는 말씀으로 인도합니다. 그 잃어버린 양은 주인 된 목자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말씀을 듣지 않고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이 양은 주소를 몰랐습니다.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를 몰랐습니다. 우리 주소는 이민자의 주소입니다. 워싱턴이 우리의 주소입니다. 향수라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민자의 주소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야 할 자리, 우리가 일해야 할 자리는 바로 이곳, 지금, 워싱턴이 우리의 주소입니다. 이 양은 주제를 잃어버렸습니다. “너 자신을 알라!”그 양은 자기를 몰랐습니다. 혼자서 교만했을 것입니다. 혼자 모든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했을 것입니다. 혼자서도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람은 혼자서는 못합니다. 서로 같이 해야 합니다. “주제파악”을 하지 못하면 자기도 힘들고 그것을 보는 사람도 힘이 듭니다. 내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만 본다면 주제파악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믿기 전에 기독교인들이 모자라고 어리석다고 했습니다. 다 죽여야 하고 다 감옥에 가두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주제는 무엇일까요? 우리의 주제는 의인은 하나도 없다고 했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제 몰랐던 주제를 깨달았습니다.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였다고 고백합니다. 이제 사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이게 바로 주제 파악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이런 고백을 할 때 우리는 겸손해 지고, 죄를 용서해 주시는 그 은혜를 깨닫게 됩니다. 나는 다른 사람과 질과 급과 계급, 신분의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상당히 잃어버리고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주인과 주소와 주제를 잃어버리고 삽니다. 이런 우리는 어떻게 살겠습니까? 목자가 양 100마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마리를 잃어버렸습니다. 목자가 99마리를 택하겠습니까? 한 마리를 택하겠습니까? 현대의 경제와 판단에 의거하면 분명히 99마리를 택하여야 합니다. 민주주의가 그렇게 세상의 평가가 그러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크고 많은 것과 높은 것을 원합니다. 마음의 생각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겉으로 드러나는 결과를 보고 평가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신앙의 세계는 다릅니다. 세상은 숫자를 보지만 신앙은 영혼을 봅니다. 세상은 99마리를 보지만 말씀은 잃어버린 한 영혼을 봅니다. 그렇다고 해서 99마리를 무시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기독교가 이원론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복을 주십니다. 99마리의 큰 수의 복을 주십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한 영혼, 한 사람의 의인, 한 사람의 믿음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겉으로 드러난 현상에 치우치는 것이 아니라 한 영혼의 소중함과 귀중함을 높이는 것이 말씀이고 신앙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1. 목자는 99마리를 포기하고 한 마리의 영혼을 선택했습니다. -십자가
목자는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을 찾기 위해 99마리를 두고 떠났습니다. 영적으로 보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좌를 떠나 세상의 잃어버린 양을 찾아 떠났습니다. 빌립보서 2장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빌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 2: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3)형체를 가지 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빌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은 우리와 같이 되고자 하나님과 동등 됨을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으로 오셨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계시면 구태여 고난과 고통을 당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한 마리의 양을 찾기 위해 떠나는 목자처럼 예수님은 왕의 자리, 의인의 자리, 편한 자리를 포기하시고 이 땅으로 내려 오셨습니다. 사람들과 같이 종이 되셨고, 사람들과 같이 죄인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많은 영광의 자리를 포기하셨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였습니다.
신앙은 높은 것을 포기하고, 낮은 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이고,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예수님은 목자가 되셔서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 시키러 왔노라”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버리셨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신앙은 버리는 것입니다. 무엇을 버립니까? 다 버리는 것입니다. 무거운 것을 다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하나님을 사랑치 않고, 세상을 더 사랑하게 하는 것들을 다 버려야 합니다. 히브리서에 말씀하시는 것처럼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들을 버려야 합니다.
예) 사람이 물에 빠졌습니다. 물에 빠질 때 짐을 가지고 빠졌습니다. 중요한 것들입니다. 재물들입니다. 그런데 헤엄을 쳐야 하는데 무거워서 헤엄을 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버리기에는 아까운 것들입니다. 살기위해서는 헤엄을 쳐야 하는데 무거워서 헤엄을 치기가 힘이 듭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현명한 사람이라면 생각해야 합니다. 결정해야 합니다. 붙들고 죽어야 합니까? 버리고 살아야 합니까? 버리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버리고 살아야 합니다. 옛날 것은 버려야 합니다. 새것들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옛사람은 죽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자꾸 옛 것을 돌아보면 새 것이 무색해 집니다. 새로운 자동차가 있는데 구태여 달구지를 타고 다닐 필요가 있습니까?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내려놓지 않으면 다 멸망합니다.
예화)옛날 지구상에는 ‘메가케로스(megaceros)’라는 거대한 뿔을 가진 사슴이 존재했습니다. 이 사슴들은 커다란 뿔을 최고의 자랑으로 여겼습니다. 모양도 몹시 아름답고 화려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슴은 얼마가지 않아 멸종하고 말았습니다.
 그 원인은 뿔의 무게에 눌려 더 이상 번식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메가케로스는 웅장하고 화려한 뿔로 인해 종족을 퍼뜨리지 못하고 지구상에서 그 모습을 감추고 말았습니다. 자랑과 자부심으로 여겼던 뿔이 오히려 비극을 초래하는 원인이 된 것입니다.
교만과 욕심은 잠간입니다. 오래가지 못하고 죽고 멸망합니다.
우리는 모두 다 죽습니다. 죄의 대가로 우리는 죽어야 합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이제 우리는 살 길을 찾아야 합니다. 죽지 않고 살아갈 길은 무엇일까요? 해답을 찾아야 합니다. 해답을 찾은 많은 사람들은 명예, 권세, 건강을 찾으려고 노력을 합니다. 그러나 살아야 하는 길은 세상을 갖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다 내어 놓아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지어야 합니다. 교만을 내려 놓아야 합니다. 욕심을 내려 놓아야 합니다. 모든 자랑을 내려 놓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채찍에 맞았고, 징계를 받았습니다. 편하게 살 수 있는 길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 마리의 양을 얻기 위해 어려운 길을 선택하는 목자처럼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사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사 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적용)우리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 지시고 고난당하신 그 예수님의 사랑과 고난을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내가 살아난 것처럼 나도 다른 양을 살리기 위해 세상을 버려야 합니다.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너를 위하여 죽은 것처럼 너는 나를 위하여 무엇을 주느냐?” 이런 찬송가 가사가 우리에게 도전이 되기를 원합니다.
2. 목자의 수고의 노력- 충성
목자는 99마리를 두고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떠났습니다. 그런데 말씀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찾기 까지 찾도록” 목자는 양을 찾아 떠났습니다. 목자가 조금 찾은 후에 집으로 돌아왔습니까? 우리처럼 대충, 건성스럽게 찾았겠습니까? 말씀은 자세하게 말씀하지 않았지만 “Until he finds it"이란 영어 말씀처럼 죽기까지, 찾기까지 찾았습니다. 사람의 눈과 체면을 보고 찾지 않았습니다. 연극, play를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목자되신 옣수님은 모든 것을 다 희생했습니다. 몸을 버렸습니다. 물을 흘리셨습니다. 피를 흘리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 4장에서 ”(고전 4:1)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고전 4:2)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목자는 충성했습니다. 그 양들을 맡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맡은 양들을 구원하기 위해 충성했습니다. 그 충성이 아버지 하나님을 기쁘게 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요 6:39)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고 했습니다. 그 뜻을 예수님이 이루셨기 때문에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 8:29)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목자가 얼마나 힘이 들고 배가 고팠겠습니까? 목이 말랐습니다. 피곤했습니다. 추웠습니다. 고독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잃은 양을 찾도록 찾기까지 들과 산과 광야를 지났을 것입니다. 끝까지 찾았습니다.
충성이라는 말은 “죽기까지”라는 뜻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하나님, 살아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지속되는 것, 변하지 않는 것, 쇠하지 않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끊임없는 사랑과 수고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을 위하여 희생하고 수고하는 것입니다. 그 희생과 수고는 변함없는 것입니다. 그냥 건성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유는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적인 헌신과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찾도록 찾으십니까? 기다리고 기다리십니까? 씨를 뿌리고 나서 가을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좀 성급해서 조금 자란 새순을 그냥 뽑아 버리지는 않습니까? 눈물 없이는 결과가 없습니다. NO TEARS NO PEARS, NO CROSS NO CROWN입니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예) 성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는 아들을 위해 17년간을 참고 기다리고 기도했습니다. 어거스틴이 얼마나 방탕했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방탕했습니다. 이방종교를 믿었습니다. 그런 아들을 그냥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안 된다, 틀렸다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아들을 위해 어머니는 오랜 세월 기도합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17년간은 긴 시간입니다. 3일을 기다리고, 3년을 기다리는 것이 보통인데 얼마나 오래 기도했습니까? 그렇게 오랜 세월 믿음으로 기다리고 기도했더니 기도의 열매가 맺혔습니다.
예) 꿀 한 병을 보세요. 그러면 꿀 한 병을 모으기 위해 벌들이 얼마나 나라 다니겠습니까?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매일 매일, 벌들은 날아다닙니다. 어떻게요? 매일 매일입니다.
“내가 매일 십자가 앞에 더 가까이 가오니”
매일 매일 성경보고 성경보고 매일 성경보고 기도하면은“
그렇게 수고하고 헌신하니 어떻게 됩니까?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 아들이 하나님께 돌아와 회개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이 됩니다.
기독교 역사에 길이 남을 훌륭한 신학자가 됩니다. 한 사람의 기다림과 기도를 통해서 또 한 사람의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한 마리의 양을 위해 찾고, 또 찾고 찾고 “또 찾고 찾고‘
이것이 충성입니다. 끝까지 헌신하고 충성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도 강도를 구원하고, 로마의 군병들을 위해 기도해 주신 것처럼 우리는 끝까지 수고해야 합니다.
적용) 우리가 하는 일은 클 수 도 있고 작을 수 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가 하고,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얼마나 충성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잘 했다 칭찬받은 것은 숫자에 의해서 평가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성실성, 그 사람의 충성, 그 사람의 노력, 그 사람의 헌신에 의한 것입니다.
3. 목자의 기쁨- 구원의 기쁨
목자가 드디어 양을 찾았습니다. 얼마나 힘이 들었겠습니까? 우리 같으면 양을 보고 화가 났을 것입니다. “너 때문에 이런 고생을 했다.” “네가 아니면 내가 집에서 잠을 잤을 텐데.” 그 책망의 소리가 지금 들리십니까?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그런 소리를 하는 소리가 들리십니까?
예수님께서 오늘 만일 우리를 책망하시는 소리를 들리면 그것이 은혜입니다. 이것이 축복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들리지 않고 거역해서 들리면 불평입니다. 목자가 양을 찾았습니다. 목자는 기뻐했습니다. 목자는 우리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기뻐하십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양같아서 다 각기 그릇행하여 제길로 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살았습니다. “멀리 멀리 갔더니 처량하고 곤하며 슬프고 또 외로와 정처없이 다니니” 가사처럼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 살았습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이런 우리를 멀리 하지 않으십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 아버지를 떠난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문 앞에서 기다리십니다. 나간 자식 돌아오기만 밤새 기다리고 기다리신다고 찬송하는 것처럼 예수님은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
(히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히 4: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오늘도 예수님 앞에 나왔습니다. 의인으로 나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죄인으로 나왔습니다. 아파서 나왔습니다. 부끄러운 모습으로 나왔습니다. 다쳐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우리를 멀리 하지 않습니다. 목자는 잃어버린 양을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기쁜 마음으로 돌아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기뻐하십니다. 우리를 긍휼히 여기십니다.
그리고 잔치를 합니다. 모든 사람을 불러놓고 잔치합니다.
믿음은 잔치입니다. 구원은 기쁨입니다. 우리가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기쁨으로 우리는 살아야 합니다.
예) 어떤 사람인 100억이 든 돈 가방을 잃어버렸습니다. 잃어버려서 걱정을 했는데 어느 누가 그 가방을 찾아 주었다고 해 보세요. 난리가 날 것입니다. 고맙다고 뛰어 다닐 것입니다. 이산가족 상봉하는 것 보세요. 얼마나 기뻐하고 감사하고 눈물을 흘립니까?
적용) 신앙생활은 감사하고, 기뻐하고, 춤추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 기쁨, 찬송, 사랑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다 지나갑니다. 새로운 세계가 열립니다. 송아지가 아깝지 않습니다. 기쁨으로 하는 일에는 인색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것, 이 모든 것이 억지나 인색함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즐거움으로 해야 합니다. 기쁨으로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살길을 찾았기 때문에 기뻐해야 합니다. 내가 목적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결론
우리는 주인을 잃어버렸습니다. 우리는 주소를 잃어 버렸습니다. 우리는 주인을 잃어 버렸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다 잃어버린 것의 비유의 말씀입니다. 나는 잃어버린 존재였습니다. 우리는 찾은 바 된 사람들입니다. 그럴지라도 우리는 때때로 방황합니다. 때로는 우리는 죄를 짓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목자를 만나야 합니다. 우리는 목자 앞에 나가야 합니다.
목자 되신 주인을 만나야 합니다. 목자와 함께 하는 주소지를 찾아야 합니다. 목자의 양이 되는 주제를 찾아야 합니다.
더 이상 방황하지 않고 하나님의 관계, 목자와의 관계를 언제나 지키고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이 축복입니다(시편103:1-22), 김범수 목사, 주일예배, 2017.8.13. 
기도하면 삽니다(마가복음9:14-29), 김범수 목사, 워싱턴동산교회, 2017.7.23.